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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재영 [축하]  행복한 삶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당신은 1%…[1] 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 | 2017-12-27 09:44:50

벌써 10년이 되어가는 강의 내용인데 문득 생각이나서 올려봅니다.

우리도 미래를 보는 안목을 키워보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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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8년 5월 22일, 장소 : 아주대 교양강좌, 강사 : 시골의사 박경철

 

내가 외과 전문의가 된 것이 1993년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딴 뒤,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서 전문의가 된다. 인턴/레지던트와 전문의와의 차이는 군대에서 소위하고 장군하고의 차이 정도 된다. 그래서 레지던트 신분에서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 그 다음날 부터 식당에 내려가면 밥을 드디어 밥그릇에 담아주기 시작하고, 가운이 폴리에스테르에서 면으로 바뀌는 등 50여 가지가 바뀐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월급이 한 10배쯤 오른다. 그래서 레지던트에서 전문의가 되는 순간 '아~ 이제부터 꽃이 피었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다.

 

 

일단은 취직을 해야 해서 당시 의국으로 들어온 인력요청서를 보니까 몇 군데 병원에서 외과의사가 필요하다고 요청한 상태였다. 아직 젊으니까 종합병원에서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큰 병원이 있나 찾기 시작했다. 종합병원급이 대전, 서울, 대구에 1군데씩 3군데가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3군데에 나의 이력서를 보냈다. 이후 회신이 왔는데 대전에서는 당시 외과의사 평균연봉의 세 배를 줄테니까 오라고 했다.

 

세 배이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혹시나 다른 사람이 채갈 까봐 팩스를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했다. 그러니 그쪽에서 '당신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두 번 생각할 것이 없었다. 돈 많이 주고, 나를 간절히 원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보따리를 싸서 대전에 내려갔다.

 

대전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병원 이름을 댔는데 기사가 병원을 몰랐다. 좀 이상했다. 물어 물어 간신히 가보니까 응급실, 외래진료실, 수술실 몇 가지만 완성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골조공사 중이었다. 이유는 인가 받은 날짜에 개원은 해야 하고 공사는 지연되어서 우선 한 개 층의 반만 오픈한 상태였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왕 왔으니까 하면서 원장실을 찾았다. 이때 원장님이 말하셨다. "당신이 우리 병원에 온 첫 번째 의사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두 번째 깨달았다.

 

뭘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외과병동에는 반드시 의사가 3명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 명은 외래보고, 한 명은 수술하고, 한 명은 밤에 응급상황을 대비하면서 쉴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있으니까 세 사람 몫을 다하고 대신 월급을 3배로 주겠다. 사람을 한 명 더 구하면 월급을 반으로 줄이고 세 명 다 차면 1/3만 받아라." 그냥 돌아서려다가 순간적으로 유혹이 생겼다. 어차피 레지던트때 잠 못자고 일했으니까 레지던트를 1년 유급했다고 생각하고 1년 바짝 일하면 나머지 2년은 놀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3주가 지나니까 죽을 것 같았다. 낮에 외래진료 2~30명 하고, 한숨 돌리려고 하면 수술준비 되었다고 하고, 수술하고 내려오면 환자 30명 기다리고, 마치고 쉴려고 하면 수술 준비되었다고 하고, 남들 퇴근할 해질녘이 되면 응급실에 환자 5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3주 이상 잠을 2시간 이상 연달아 자보질 못했다. 그때 서울의 한 경제연구소에 있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좋은 강연이 있는데 들으러 오지 않겠냐고 말을 했다. 무슨 강연이냐고 묻자 미래의 트렌드에 대해서 프랑스에서 유학을 갖다 온 똑똑한 친구의 강연이라 들어두면 일생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내가 말했다. "대전 시민의 생명이 내 양 어깨에 걸려있다. 지금 경제강연 듣겠다고 병원을 비울 상황이 아니다." 끊으려고 하는데 친구가 또 강조했다. "이 강연을 안 들으면 평생 후회할 거다."

 

그래도 전화를 끊었는데 일생의 기회라는 등, 평생 후회할 거라는 등의 얘기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그 다음날 원장실 문을 열고 의학세미나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갸우뚱거리시면서도 거액의 용돈까지 주시며 허락을 해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한 번 풀어주지 않으면 이대로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시간이 생기고 돈이 생기니까 혼자 가기 심심해졌다. 누굴 데려갈까 고민을 했지만 아무리 주위을 돌아봐도 평일 오후에 하는 강연을 같이 들을 멀쩡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MBA 마치고 와서 1년째 백수가 된 친구에게 전화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 하는 무슨 강연이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승낙을 했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박사급 연구원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때 연사가 들어서자 불쾌한 기색이 강연장에 차면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연사의 복장이 황당해서였다. 강연하러 오면서 찢어진 청바지에 무릎이 다 나왔고, UCLA가 적힌 티셔츠에 뉴욕양키스 모자를 쓰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에서 시작된 강연이 10분 정도 되니까 뒷줄부터 일어서서 한 명씩 나가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나니까 맨 앞줄만 남고 외부참석자는 우리들뿐이었다. 이유는 강연 내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연주제가 기가 막혔다. 강연의 주제를 적겠다면서 칠판에 ‘WWW’라고 적고 나서는 다짜고짜 하는 말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 W의 세상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W 안으로 은행도 들어오고 증권사도 들어오고, 이걸로 핵무기도 만들고, 이걸로 전쟁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딱 들으면서 나는 이 친구가 테트리스 게임 만들다 미쳤거나 망상장애 같은 정신질환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연구원들도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고 다 나간 것이다. 93년도에 이런 얘기를 하면 정신병자이다. 강연이 끝나고 반응들이 황당하니까 연사도 민망해서 머리를 긁으면서 나가는데 아무도 박수 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연구소 역사상 그 전으로도, 그 후로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초대한 친구에게 '이따위 강연을 들으려고 대전시민을 팽개치고 내가 여기 앉아있어야 했느냐' 따졌다. 그 친구도 자기도 이럴 줄 몰랐다고 미안해했다. 그때 갑자기 오른쪽에 앉아있던 백수가 박차고 일어서더니만 나보고 빨리 돈 10만원만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저희들은 저녁 먹고 따로 놀아라, 나는 저 W하고 이야기 좀 하고 가야겠다고 대답을 했다.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단다. 말려도 막무가내길래 여비 중 일부를 떼주고 그 길로 따로 헤어져 친구와 저녁 먹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백수는 그 길로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려는 W를 잡았다고 한다. "저는 W를 믿습니다. 저를 W의 세상으로 인도해주십시오." 옥신각신하다 W가 납치되어 간 곳이 마포에 있는 주먹고깃집이었고 새벽 2시까지 풀려나지 못했다고 한다. 백수는 W세상으로 뛰어들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 달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고 결국 W는 이러저런 몇 가지 조언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후에 들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다음에 문제의 W가 작은 사무실을 하나 내었다. 자본금은 70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회사의 자산가치는 현재 2조 가까이 된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자본금 700만원에서 2조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십수년전에 이러이러한 세상이 될 거라고 한 것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귀에다 대고 얘기해줘도 미쳤다고 믿지 않았던 그 세상이 거짓말처럼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소름이 끼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오천만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천재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백수이다. 그 놈은 나랑 헤어지고 3주쯤 후에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다짜고짜 첫 월급을 전부 빌려달라는 것이다. 사실 백수가 빌려달라는 말은 그냥 달라는 말이 아닌가? 거절했더니 지금 그 돈을 빌려주든지 30년간의 인간관계를 끊든지 선택하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월급에서 최소생계비를 제외하고 모두 빼앗겼다.

 

백수는 그 돈으로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또 연락을 해왔다. 사업을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편지를 주고 받는데 필요한 가상주소를 만들라는 것이다. 지금의 전자메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무조건 망한다고 충고했다. 첫째, 너 일년에 편지 몇 통 쓰냐.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지를 안 쓰는데 그게 되겠냐? 둘째, 설령 일년에 세 통 이상 편지를 쓴다고 해도 우표 값이 아까워서 사용 안 할 것이다. 셋째, 편지는 자고로 육필로 써야 한다. 이 사업은 무조건 안 된다. 그랬더니 백수가 말했다. "W가 말씀하시기를.. 모두가 컴퓨터로 편지를 쓰는 날이 온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디를 하나 만들었다.

 

또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병원에 전용선이 들어왔다. 당시 시범적으로 정부기관과 종합병원에 인터넷 전용선을 놓아준 것이다. 하지만 쓸 데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첫 번째 전자메일이 날아왔다. 동창회 소집메일이었다. 기껏 한다는 짓이 이런 거냐고 생각했는데 수신인이 170명이라는 걸 보고 놀랐다. 그때 전체회신으로 나는 대전에서 의사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디서 뭐하니라고 보냈는데 이틀 만에 무려 70~80명이 답장을 해 온 것이다. 다들 신기해하는 반응이었다.

 

그 동안 백수가 동창회 명부를 들고 정부기관과 종합병원에 다니는 동창들을 가입시키고 낚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병원 직원들에게 전자메일을 소개했더니 다들 메일놀이에 빠져있느라 병원업무가 마비가 될 정도였다. 병원 전 직원이 가입하는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대구에서 시작한 전자메일 서비스회사가 일년 반 만에 250만 명의 가입자를 모집했다. 그리고 99년 초에 골드만삭스라는 외국계 투자회사에 600억에 지분을 넘겼다고 한다. 지금은 엄청난 빌딩의 소유주이자 그곳에 입주한 4개 벤처회사의 지분을 소유한 지주사 회장으로 있다. 백수가. 그리고 내 돈은 아직도 갚지 않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상용메일 서비스였다.

 

나는 그 과정에서 굉장히 가슴이 아팠다.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친구가 잘 된 게 배 아파서가 아니라 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는데 왜 백수에게는 인생을 걸고 뛰어들어야 할 복음으로 들리고 나한테는 망상장애를 가진 환자의 기괴한 이야기로 들렸던가? 이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차이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고민을 하던 차에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책에서 답을 구했다. 제레미 러프킨의 초기 저작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현생 인류가 30만 년 전에 출발을 할 때, 그때 가진 자산은 돌도끼가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30만 년이 흐른 지금에서 볼 때 인류가 가진 자산은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 30만 년 동안 나고 죽었던 모든 인류가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0.1%의 창의적인 인간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꿈꾸지 못한 것을 꿈꾸고, 여기가 새로운 세상이다 라며 엄한 곳에 깃발을 꽂으면 0.9%의 통찰력과 직관을 갖춘 안목 있는 인간이 그것을 알아보고 거기에 뛰어 들어서 한 배를 타고 등을 밀고 손을 당기며 이뤄낸 1%의 역사다.

 

그래서 제레미 러프킨은 0.1%의 창의적 인간과 그것을 알아보고 협력하고 함께 문명을 건설한 0.9%의 안목 있는 인간 즉 1%의 인간이 문명을 이끌었고 나머지 99%의 인간을 잉여인간으로 규정했다. 가슴이 뜨끔했다. 잉여인간이란 유기물 즉 섭취와 배설을 반복하며 이산화탄소만을 발생시키는 존재이다.

 

그래서 항상 0.1%가 새로운 것을 주장하면 0.9%는 함께 그것을 이뤄내고 나머지 99%는 매번 세상 참 좋아졌다.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참 놀랍군... 이런 얘기를 하면서 따라오고 있다. 그걸 보니 답이 딱 떨어졌다. W는 0.1%였고, 내 친구 백수는 0.9%에 속해있고, 나는 잉여인간이었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90년대 일어난 이 현상들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뒤져보니 구구절절이 제레미 러프킨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대표적인 예로 경제사만 놓고 봐도 한 200년 전에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공작기계의 산업특허 1호는 방적기계이다. 당시 영국에선 양털이 있어도 모직능력이 없어서 네덜란드로 가져가 가공한 후 다시 수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모직물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쌀 때였다.

 

그래서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한다는 것은 당시로 봤을 때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 기계를 만든 W는 획기적인 것을 개발한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했는데 당시 글래스고우에 첫 공장이 만들어졌을 때 주변 감자밭 주인 중 일부가 이렇게 생각했다. "저 놈은 W다. 저거 세상 뒤집겠다. 산업의 중심이 되겠다. 나도 저기에 뛰어들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때 아무리 기계가 잘 돌아가봐야 양털이 없으면 모직생산이 중단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천재들의 가장 큰 단점은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장은 지었는데 양털을 어디서 가져올 지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때 일부 감자밭 주인이 감자밭을 갈아엎고 양목장을 시작했다. 모직생산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양털이 대량으로 필요해지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양목장 주인이 가져가게 되었다. 뒤늦게 너도나도 감자밭을 갈아엎고 양목장을 하는 바람에 영국에 감자파동이 일어난다. 감자기근으로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절반이 죽게 되는데 원인은 바로 모직 때문이다. 그만큼 한 명의 생각이 사회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유럽에 소형내연기관이 만들어지고, 그걸 마차에 붙여 초창기 자동차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걸 자동차로 볼 수는 없었다. 근대적 개념의 자동차를 가장 처음 만든 사람은 헨리 포드이다. 1903년에 헨리 포드가 변속기와 악셀레이터가 달려 있는 자동차라는 것을 만든다. 제작 발표회를 할 때 언론들은 헨리 포드를 조롱했다. 기차보다 더 비싼 생산단가로 만들어졌는데 고작 4명 밖에 못 탄다는 것이다.

 

헨리 포드는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좌절하고 절망했다. 그는 조롱하는 사람들을 반대로 비웃었는데 대량생산하면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해진 길 밖에 가지 못하는 기차와 달리 자동차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길로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때 동네 건달 하나가 헨리 포드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저 놈은 W다." 자동차를 만들 기술은 없었지만 다행히 정유공장의 지분이 있었고 돈이 있었기에 주유소 사업에 뛰어들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10대도 만들기 전에 8곳에 주유소를 만든 것이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1907년에 대량생산모델 포드T카가 등장하면서 정말 가격이 낮춰졌다.

 

이후 20년간 온 세상이 자동차로 뒤덮였다. 날건달은 1940년 중반까지 주요 길목을 주유소로 모두 선점하고 미국 전체 주유소의 94%를 독과점해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의 독점을 견디다 못해 만든 법이 바로 공정거래법이다. 이 날건달이 바로 록펠러이다.

 

또 10여 년이 흘러 1,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지독히 통신이 문제였다. 모든 교신내용을 적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파수 통신을 이용한 무전기를 만들어 대량으로 전장에 납품한 사람이 있었다.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오늘날의 모토로라가 시작된 것이다.

 

또 10년이 흘러서 트랜지스터가 개발되었다. 사람들이 만들었나 보다 이러고 있을 때 트랜지스터를 이용하여 진공관을 대체하면 전자산업이 발달할 수 있겠다고 믿고 그 당시에 뛰어들었던 0.9%의 기업들이 있었다. 그 회사들은 어마어마한 전자회사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1960년대 기계와 전자문명의 시대로 수십 단계 위로 밀어 올린 주역이 되었다.

 

또 10년이 흘러서 반도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W가 반도체를 들고 나오자 99%는 비웃었다. 어쩌라고. 그때 반도체로 책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생겼다. 그것으로 80년대가 컴퓨터의 시대로 한 시대가 업그레이드되었다.

 

  • 김동덕2017-12-28 06:20 신고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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